인생길 산책(166)

*<민족시인 고 은과 만나게 된 인연>

민초 이 유식 시인(한인뉴스 고문)

*고은 시인과 민초 이유식 시인

속절 없이 세월은 흘러 흘러 내가 한국문단의 실태를 알듯 할 때 <신경림> 이사장과 교류가 깊어질듯 할 때 신 이사장은 세상을 떠나셨다.

다음 해에 귀국했을 때 신 이사장이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느 비오는 날 신 이사장을 그리며 그 <여인네> 식당을 찾았다.

둘이 만나 동동주를 마시던 그 창가에서 혼자 앉아 동동주 한 대박을 마신 기억이 있다. 인생살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신 이사장의 말, 이 사백! 건강이 제일이라며 건강 잘 지키라는 지도의 말씀이 온 뇌리를 흑백 영화처럼 주마등 같이 떠올라 나를 슬프게 했다.

그 후 나는 <고 은>시인과 깊고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아득한 옛날 이야기이나 기억을 더듬으면 이렇다.

어느 날이던가 토론토가 아닌 다른 도시에서 살아가는 동포들은 토론토를 조국의 서울이라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이유는 토론토에 우리 동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고 문화,교육,경제.정치 등 모든 분야가 토론토 동포사회가 타 지역 동포들에게 선도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부족한 사람이 서울로 생각하는 그 토론토에서 발행하는 중앙일보 일간 신문사의 <김 효> 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유인 즉 자기신문사의 객원 논설위원으로 글을 써 달라 하였다. 이에 사양을 하다가 12년이란 긴 세월을 될 소리 안될 소리로 글을 쓴 경험이 있다.

그 후 중앙일보에 썼던 글을 모아 <캐나다를 알자>라는 칼럼집을 출간했다. 이 칼럼집이 조국에서 한동안 꽤 많이 팔렸는데 이 칼럼집을 읽은 독자들이 캐나다로 이민을 와서 나를 찾아와 인사를 한 예가 있었다.

< 죤 크레첸>이 연방 총리 시절이였는데 이민길이란 칼럼을 읽고 울었다며 용기를 잃지 말라는 총리의 부인 <이랜 크레첸>이 격려의 편지를 보내어 주었는데 잘 간직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이 편지가 어디로 갔는지 소식 없이 사라졌다.

고 은 시인과의 인연을 갖게 된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내용은 그때 모국 중앙일보에서 매일 아침 시가 있는 아침에 고 은 시인에 의하여 나의 시 이민길이 좋은 시로 선정이 되어 중앙일보에 발표가 되었다. 그 때 나의 마음은 내가 명 시인의 반열에 오른 것 같은 아주 좋은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 후 수소문을 한 결과 고 은 시인이<하바드>에 객원 연구원으로 초청을 받아서 미국에 와 계심을 알고 전화를 하였다. 저의 졸시를 선정해 주심에 감사를 드리며 로키산도 관광하시고 이 곳 동포들과의 만남을 제의하였다. 이에 바쁜 일정의 시간을 쪼개에 3박4일간 이 곳을 찾으셨다.

이에 한인 천주교회 성당에서 동포 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삼팔선>이란 시를 낭송하시고 강연도 해 주셨다. 뜻 밖에 나에게 한편의 시를 낭송하라는 말씀에 <시월이여> 라는 시를 낭송한 기억이 있다.

시인님의 방문이 급작히 이루어져 동포들에게 충분히 홍보가 되지 않았슴에 아쉬움이 가득 하였다.그 후 우리부부와 시인님의 부부는 1박 2일 여정으로 제스퍼 관광을 즐겼다.

제스퍼로 가는 중 로키산 중에서 바베큐를 했는데 우리는 마음 껏 와인과 불갈비를 안주 삼아 많은 술을 마셨다. 고 은 시인은 술김에 하시는 말씀이라 생각하는데 자기는 '전 한양대학 교수인 이 영희 교수와 의형제를 맺었는데 이 교수가 연전에 나를 두고 작고를 했지. 나 유식이와 의형제를 맺고 싶다 '하셔서 멍멍하게 들었는데 메모지에 <로키 산의 결의 영원토록> 고 은이라고 싸인을 하여서 주셨다.

그 때부터 나는 형님이라 불렀고 고 은 시인은 동생 유식이라 불렀다.

다음해부터 3,4년 귀국을 하면 형님 제가 왔습니다. 문안 전화를 하면 다음날 안성에서 일반 버스를 타고 인사동에서 안국동으로 들어가는 오두막 같은 동동주집 <노고단>이란 한정식 집에서 낮 11시 부터 오후 5시까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동동주를 마셨던 기억은 내 생애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수원 시에서 시인님에게 좋은 집을 지어서 수원시민으로 이사를 할 때까지 우리의 만남은 계속 되었으나 무역을 하며 자주 귀국하던 것도 나의 공급처에서 몬트리얼의 중국인 바이어를 선정하며 나에게 물건 공급을 해 주지 않아 귀국 길이 잠시 멈추어졌었다.

뜻밖에 미투라는 요상한 바람이 불고 남녀가 농담을 한 것도 여인의 인격을 모독했다느니 혹은 행동이 좀 해학적이면 신문에 기사를 내고 이 여파는 고 은 시인에게도 모질게 불어 인격적인 면에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의 글이 신문 지상을 도배를 했는데 최 모라는 문단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여자 시인이 자기가 명시인의 반열에 오를려 함인지 고 은 시인의 해학적인 행동과 말이 성적모욕이라고 떠드니 이런 자와 시비를 논할 수가 없기에 무고임을 변명도 못하고 사회에서 매장되는 어처구니 없는 입장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 후 나와의 인연이 끊어져 귀국할 때 마다 고 은 형님을 찾았으나 연락처를 알길이 없다. 어디에 계시던 건승을 기원드리는 마음 간절하다. 가끔은 만났을 때 좀더 성실히 모시지 못했음이 한 없는 회한으로 내 마음을 울리고 있다.

민초 이유식 시인(한인뉴스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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