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도의 추억

-서해 고도에서 보낸 그 여름 한철

-고생도 지나고 보면 그리운 추억으로

*아름다운 대청도 해안가 모습

지금부터 44년 전인 1981년 초여름 이맘때, 나는 서해 최북단 대청도에서 군생활(소대장)을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해군간부후보생(OCS)을 통해 해병대 소위로 임관된 내가 맨처음 배속된 부대가 백령도 해병대 여단본부였고 예하 대대가 대청도였다.

지금은 인천 연안부두에서 쾌속선으로 3=4시간이면 당도하지만 그 당시엔 여객선을 타고 12시간을 항해해야 했다.

0…긴 여정 끝에 도착한 백령도는 ‘신삥 소위’에게는 경외로움 그 자체였다.

육지를 떠나 하루를 꼬박 달려온 그 먼 바다 한가운데에 그처럼 아름답고 큰 섬이 있는 줄을 입대 전에는 상상도 못했었다.

서해 5도를 관할하는 해병대 백령도 여단 중에서도 나는 다시 배로 30여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대청도 대대에 배속됐다.

 0…젊은 시절, 서해 최전방에서 보낸 그 시절 경험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북한 해주 땅이 바로 코앞에 있고 효녀 심청이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의 푸른 바다는 파도가 잔잔하고 햇빛이 찬란하면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기상이 불순하고 파도가 거세면 무서울 정도로 을씨년스러웠다.

북한 장산곶이 빤히 보이는 이쪽 진지에서 우리는 검푸른 바다를 향해 밤낮 없이 총부리를 겨눈 채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돌발상황에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0…내가 대청도에 첫발을 디딘 계절은 지금과 꼭 같았다.

초여름날 밤, 장교숙소(BOQ) 도착 직후 발칸포가 검은 하늘을 향해 드르륵 드르륵 불을 뿜어대던 기억이 선하다.

북한 항공기가 우리 해안에 바짝 접근해와 경고사격을 가하는 소리였다.

나는 그때 이곳이 최전방이라는 사실이 실감나는 동시에 내가 과연 살아서 제대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공포감이 엄습해왔다. 

0…다행히 다음날부터는 별일 없이 평상으로 돌아갔지만 그곳엔 늘 긴장이 감돌았다.

해안방어가 주임무인 우리 소대는 특히 야간경계근무가 중요했다.

나는 매일밤 바닷가 철책선을 따라 야간순찰을 돌면서 병사들이 졸지는 않는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항상 신경을 써야 했다. 

순찰을 돌고 온  후 침침한 벙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노라면 처연한 파도소리가 귓전을 맴돌고, 끝없는 고독감이 밀려들곤 했다.

그럴 땐 침대 밑에 숨겨둔 막소주를 들이켜고 잠을 청하는 날이 많았다.  

0…요즘같은 초여름날, 평상시의 서해 앞바다는 하얀 갈매기들이 한가롭게 떠다니는 평화스런 섬이다.

그런 해안초소에서 우리 부대원들은 야간경계근무에 대비해 낮에는 잠을 자둔다. 밤과 낮이 바뀌는 생활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낮엔 특별히 할 일이 없어 무료한 감마저 들었다. 

0…소대장으로 부임한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나보나 나이도 많고 결혼까지 한 선임하사(중사)가 제안을 했다.

심심한데 전복이나 따다가 소주나 한잔 하자는 것이었다.

신임소위로 ‘똥기합’이 잔뜩 들어있던 나는 “전방부대에서 낮부터 그러면 되느냐”고 힐난은 하면서도 귀가 솔깃했다.

스쿠버다이버 출신인 선임하사는 순식간에 바다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 해삼과 소라, 전복을 잔뜩 따갖고 올라왔다.

청정해역에서 따온 싱싱한 해산물을 안주 삼아 막소주 한잔 기울이는 맛은 기가 막혔다.

0…그러나 사실 이 선임하사 때문에 속도 많이 썩였다.

태권도 등 만능 스포츠맨인 그는 리더십이 뛰어나 부하들을 잘 다뤘지만 술이 취하면 하급자를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다.

이에 전임 소대장은 내게 업무를 인계하며 “김 중사를 장악해야 앞으로 소대장생활이 편할 것”이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0…어느 날,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그를 불러 대낮부터 술 대작(對酌)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의 속마음을 떠보고 가정사 힘든 점은 없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술이 몇 순배 돌자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0…중학교를 중퇴한 그는 두 딸을 둔 부인이 가출해버렸고 노모가 행상을 하며 힘들게 살고 있다 했다.

그러면서 그는 “소대장님 같은 분은 저같은 사람들의 심정을 잘 모를 것”이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나는 그를 인간적으로 대하기 시작했고, 내게 삐딱하게 대했던 그도 마음을 열며 충성을 다해 보필했다.

그 후 나의 소대장 생활이 순탄했던 것은 물론이다.  

0…그런가 하면 저녁에 우리 부대로 출근하는 마을 방위병이 있었는데, 그는 올 때마다 어부 아버지가 배를 타고 출어해 잡은 홍어를 한마리씩 들고 왔다.

충청도 내륙 출신인 난 그때 홍어라는 생선의 맛을 처음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대청도 홍어’라면 무척 귀한 생선인데 그때는 그게 귀한 줄도 몰랐다.      

 0…한국남자들이 인생에서 겪은 가장 잊지 못할 경험 중 하나가 바로 군 생활일 것이다.

오죽하면 제대한지 수십 년이 흘러도 꿈에 다시 군대에 끌려가는 악몽을 꿀까.

하지만 청춘의 황금기를 고스란히 바쳤던 군대의 악몽도 세월이 지나면서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포장되니 무슨 조화인지.

0…제대 후 4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대청도 앞바다의 푸른 파도가 눈에 선하다.

청정해역 황금어장인 그 바다에서 남북의 어부들이 함께 평화롭게 고기를 잡으며 살아갈 날을 그려본다. (南村)

……………………………………..

*이곳에 기사제보와 광고주를 모십니다.

*문의: 647-286-3798/ yongulee@hotmail.com

(독자 후원금 E-Transfer도 접수중)

*많은 독자분들이 후원금을 보내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온라인 한인뉴스 대표 이용우

Next
Next

인생길 산책(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