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길 산책(173)
*<편운 조병화 시인님을 그리며>
민초 이유식 시인(한인뉴스 고문)
*편운 조병화 시인
63년 전으로 돌아가서 그 때의 나의 삶을 다시 뒤적여본다.
밤 1시에서 3시 사이에는 변함없이 전화통을 잡고 있어야 하던 때가 있었다. 즉 북한에서 타전되어오는 난수표 숫자이다. 25,17, 38, 95. 47, 07.
처음에는 이 숫자를 알길이 없었다. 전방부대에서 근무하던 때이다. 이등병 계급장이 하사 계급장을 달고 외출 시에는 사복으로 갈아 입고 인근 면 소재지로 출장을 다니던 일들이 떠오른다.
이등병이 하사계급장을 달고 9329라는 명찰만 붙이고 면내와 이 부대 저 부대 여기저기를 사찰차 외출을 한적이 있었다. 그 시절 부근의 주둔부대는 타이 부대와 미군 부대 한국의 포병부대 및 공병부대 등이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을 더듬어본다.
신병훈련을 마친 나는 그저 주어진 운명으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한다는 사명감에 특별한 뜻이 없이 나라에 몸을 맡길 따름이었다. 군입대도 대학 2학년 초에 영장이 나오리라는 예측에서 이가 빠진 것을 새로 틀이를 해 넣고 군에 입대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삼형제 중 막내인 유복자로 태어난 나는 아버지 얼굴도 못 본채로 이 세상에 태어난 불행자였다. 등록금을 낼 형편이 없었으나 어느 형도 나에게는 관심이 없었기에 나의 힘으로 등록금을 작만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어 군대 생활을 마치고 나면 어떤 길이 열리리라는 막연한 생각에 군대에 가야함이 나의 장래에 최선의 길로 각인되었다.
윤택한 가정이였으나 나는 가정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 어머니는 여자의 삼종지도만 덕목으로 생각하셨기에 두형의 나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예컨데 서울 돈암동에 집이 있었고 큰 형님은 그때 중앙고등을 다녔는데 고향이 동향인 김계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절친으로 그의 학비와 서울 생활의 비용을 지불해주며 같이 금강산 관광을 다닌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둘째 형은 용산중학을 다녔는데 한국전쟁으로 낙향을 하여 경북대학을 졸업후 자기가 하고싶은 일만 열심이었던 위인이셨고 동기간의 정 뭐 이런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분이었다. 더 이상의 상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각설하고!… 논산서 훈련을 마치고 전방지역에 배치가 되었고 재수가 좋았는지 특수부대 파견대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나의 업무는 파견부대의 9명 대원의 모든 행정, 보급, 서무 등 파견부대 살림살이를 혼자서 처리하며 위의 상사의 지휘를 받고 일처리를 하는것이었다.
밤에는 북한에서 타전되는 난수표를 받고 해석을 하여 파견대 대장께 보고와 동시에 부대 본부에 직시 보고하는 일이였다. 2급 비밀을 허용 받았기에 가능했다.
본론적으로 조병화 선생의 시를 접한 것은 내 생애에 처음 시라는 것을 읽게 된 후의 일이다. 시가 무엇인지 문학이 무엇인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는데 우연히 편운 선생의 시를 접한 것은 밤에는 주 업무인 북에서 넘어오는 난수표를 듣고 해석을 하여 상부에 보고를 하는 일을 하다가 보니 밤 시간에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낮에는 긴급한 일이 없었기에 이책 저책을 탐독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 편운 선생의 시 한편을 읽고 이 작품이 나의 인생에 최고 명분으로 살아가는 동기를 부여해 주셨다.
편운 선생의 그 시는 나의 졸작 <뿌리 44년 캐나다 이방인의 뒤안길> 137쪽에 상새히 발표를 한 적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6년전에 나의 책 "뿌리"를 내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라도 자식들이 아버지가 캐나다에서 살아온 삶을 알리게 하고 나의 뿌리인 조상으로 부터 내가 이민생활을 한 모든 내용을 글로 남긴 칼럼 겸 자서전이었다.
간단히 편운 선생의 시 한편에 매료되어 조국에서 이민생활을 하면서도 이 시 한편을 잊지 못했고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 준 그 시 한편, 편운 선생의 명복을 빌면서 여기에 그 전문을 발표한다.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 올시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사나운 거리에서 모조리 부스러진// 나의 작은 감정들이// 소중한 당신의 가슴에// 안겨 들은 것입니다// 밤이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약한자들의 최대의 행복// 제한된 행복을 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 연애도 없이 비극만 깔린 아스팔트// 어느 이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 별들 아래//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 보다 앞선 벗들이// 인생은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을 두고// 돌아들 갔습니다// 벗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온 생명을 바치고 노력을 한다 해도//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과 같이 믿어야 했습니다. (2005년 3월 10일)
<상기 편운 선생님의 시를 패러디한 나의 시 그림자>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당신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나그네의 서러움도 아니였고// 배 고품의 절규도 아니 였습니다// 망각된 세월 속에// 당신의 검은 눈동자가 있어야 했고// 버림 받은 착각 속에// 허무한 인생을 더듬 던//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수정같은 눈물 속에//무작정 당신의 환영을 되새겨야 했습니다//얇팍한 지식과 기회에 얽매이면서도// 당신의 하이얀 살결은 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위선 증오 시비에 휩쌓이지 않으려고// 팔닥이는 심장을 당신의 가슴에 응고 시켜야 했고// 기약 없는 방랑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1978년 10월 초창기 이민생활의 고통 속에서)
편운 선생은 1921년 경기도 안성 난실리에서 출생 2003년에 이승을 떠나셨다. 난실리에는 편운 조 병화 문학관이 설립되어 있고 53권의 시집과 선생이 집필한 160권의 책이 전시되어 있다.
한번도 뵙지 못한 후학으로 무엇을 더 논하리까마는 여기에 한 탁란의 이방인이 선생의 시를 좋아하는 한 무명의 유명 시인이 선생을 그리는 마음에서 위와 같은 졸필을 남겨봅니다. 감사합니다.
민초 2025년 8월 17일 (한인뉴스 고문)
……………………………………..
*이곳에 기사제보와 광고주를 모십니다.
*문의: 647-286-3798/ yongulee@hotmail.com
(독자 후원금 E-Transfer도 접수중)
*많은 독자분들이 후원금을 보내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온라인 한인뉴스 대표 이용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