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모도원(日暮途遠)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고…

-주어진 현실 앞에 최선을 다해 걸어갈 뿐

나 같은 한자(漢字) 세대는 사자성어(四字成語) 쓰기를 즐긴다.

여러 말 대신 네 글자만 대면 되니 무엇보다 시간상으로 경제적이고, 뜻이 함축적이어서 직설적 어법보다 운치가 있다.

또한 그런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을 알아야 하니 자연히 배움도 함께 따른다.

0…집안 내력 탓인지 나는 일찍이 어.문학에 취미가 있어 중.고교 시절부터 국어.영어를 비롯해 한문.고전.제2 외국어(독일어) 등에 자신이 있었다.

수학이나 과학엔 영 취미가 없었지만 어.문학 시간만 되면 신이 났다.

학창시절 배운 한자실력에 더해 기자생활을 하면서 더욱 한자를 많이 쓰게 됐다.

지금도 술자리에서 흥이 오르면 한시(漢詩)를 읆조리곤 한다.

0…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한자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됐고 영어를 어학실력의 으뜸으로 치게 됐다.

요즘 젊은세대에게 한자성어를 주절거리면 아마 “OK, Boomer” 소리를 듣기 알맞을 것이다.

“알았어요, 아저씨”라는 뜻으로, 젊은이들 사이에 고리타분한 구세대, 즉 ‘꼰대’의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아직도 기성세대는 한자어를 즐겨 쓰는 습관이 있고 나 또한 그러하다.

특히 이즈음 연말이 되면 가는 해를 아쉬워하는 한자어가 많이 쓰인다.

0…일모도원(日暮途遠).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뜻이다.

무슨 일을 함에 있어 시간이 촉박한 상황을 이른다.

이 말은 원래 중국 춘추시대, 초 평왕과 그의 신하 오자서 일가의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에서 유래했다.

0…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에는 오자서가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시신을 꺼내 구리채찍으로 300번이나 후려갈긴 후에야 그쳤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오자서의 친구 신포서가 그의 행동을 지적하며 “일찍이 초나라의 신하로서 왕을 섬겼던 그대가 지금 그 시신을 욕되게 하였으니, 이보다 더 천리에 어긋난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나무랐다.

이에 오자서는 “吾日暮途遠 故倒行而逆施之”(해는 지고 갈 길은 멀어,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일축한다.

0…즉, 일모도원은 오자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핑계였다.

그의 행위는 후대로 오면서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오늘날 오자서는 불굴의 의지로 춘추시대의 패자를 바꾼 초인이 아닌 ‘복수의 대명사’로 더 기억되고 있다.

‘시간이 급해 어쩔 수 없었다’는 구실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많이 횡행하는 일이다.

0…유래야 어쨌든 이즈음엔 ‘일모도원’의 심정이 아닐 수 없다.

이룬 일 없이 한해를 보내고, 또다시 나이만 먹고, 자꾸만 할일은 눈에 띈다.

0…‘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이란 말도 내가 좋아하는 성어 중 하나다.

제갈량이 했다는 이 말은 “일을 꾸미는 건 사람이지만 이루는 건 하늘이다”는 뜻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쓰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과 비슷한 말이지만, 굳이 구분을 하자면 ‘진인사…’는 결과가 나오기 전에 기대를 걸고 하는 말이고 ‘모사재인…’은 결과가 나온 후(대부분 원했던 바가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에 관한 것이다.

0…이 말의 유래는, 제갈량이 북벌을 단행할 때 호로곡에서 사마의를 상대로 화공을 펼쳐 궁지로 몰아넣었으나, 가장 중요한 시점에 비가 내려 화공이 실패하고 사마의를 살려보내고 말았다.

이를 두고 과거 적벽에서는 화공으로 조조의 대군을 물리쳤으나 이번에는 소나기로 인해 실패했으니 일이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렸구나 하고 탄식하며 한 말이다.

따라서 정확히는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 불가강야(不可强也)’,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되 일을 이루게 하는 것은 하늘이니 강제로 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한 해를 돌아보며 새삼 이 문구를 떠올리는 것은, 나는 그저 매사에 최선을 다할 뿐, 모든 결과의 주관은 하늘의 뜻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0…한국의 대학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는 ‘변동불거(變動不居)’다.

세상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면서 변한다는 뜻이다.

0…변동불거는 유학의 4대 경전 가운데 하나인 ‘주역’에 실린 말이다.

이 사자성어를 추천한 양일모 서울대 교수(자유전공학부·동양철학)는 “지난 연말 계엄령이 선포됐고, 올봄에는 대통령이 탄핵됐다. 세상을 농락하던 고위급 인사들이 어느덧 초췌한 모습으로 법정을 드나들고 있다”며 “초라한 국내 정치판과는 달리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세계인의 감성을 흔들었다. 해외에서 갑자기 날아온 케이 컬처의 위력은 한국 정치의 감점을 만회하고도 남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양 교수는 “유난히 급변하는 한국에서는 변화하는 현실을 추종할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원리 탐구에 힘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회 안정과 지속가능성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다.

0…지난해 교수들이 선정한 사자성어는 ‘도량발호’(跳梁跋扈)였다.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 함부로 날뛴다’는 뜻이다.

교수들은 선정 사유로 “권력자는 국민의 삶을 위해 노력하고 봉사하는 데 권력을 바르게 써야 함에도 권력을 사적으로 남용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굳이 부연설명이 필요없는 고국의 참담한 현실이었다.

0…이제 고국에 좀 더 희망적이고 건설적인 사자성어 문구가 떠오를 날을 고대해본다. (南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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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한인뉴스 대표 이용우

(충남 대전/ 고려대 영문과/ 해병대 장교(중위)/ 현대상선/ 시사영어사(YBM) 편집부장/ 인천일보 정치부장(청와대 출입기자)/ 2000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국장/ 토론토 중앙일보 편집부사장/ 주간 부동산캐나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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