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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높은 원주민 기숙학교 대학살극

*<이거 캐나다 역사 맞나?>악명높은 원주민 기숙학교 대학살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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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주 이어 이번엔 사스카추완 원주민 기숙학교서 표식 없는 어린이 무덤 751구 발견, 캐나다 전국이 발칵…1899년 설립, 연방예산 지원하에 운영…

BC주 캠룹스에서 215구의 어린이 유해 발견된 지 4주 만에 또!...

유럽계 백인들이 자행한 식민역사의 잔혹성 드러나 큰 충격…

https://www.ctvnews.ca/canada/cowessess-first-nation-says-751-unmarked-graves-found-near-former-sask-residential-school-1.5483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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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 이유식 시인의 인생길 산책 84

<<눈물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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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납니다.

자기가 태어난 나라 코리아를 자기 조국이라고 생각하며, 6.25전쟁이 발발하자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중 ''내 조국에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히 공부하고 있겠는가.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를 해도 늦지 않다''고 하며 부인과 아들을 처가에 맡기고 자원 입대해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애국충정을 높이 기리며…

 서울 녹번동 은평평화공원에 군복차림의 동상이 하나 서 있다.

 6·25전쟁 첫 해인 1950년 9월 22일 서울수복작전 때 녹번리 전투에서 29세로 전사한 미국 해군 대위 <윌리엄 해밀턴 쇼>를 기리는 동상이다. 동상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다 한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한국 선교사 <윌리엄 얼 쇼>의 외아들로 1922년 6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미국 웨슬리언대를 졸업하고 2차 세계대전 중 해군 소위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다.

 1947년 한국으로 돌아와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며 한국해안경비대 창설에 기여했다. 제대 후 하버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중 6·25전쟁이 터지자 젊은 부인과 두 아들을 처가에 맡기고 재입대했다.

 이때 그는 부모와 주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조국에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히 공부만 하고 있겠는가.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를 해도 늦지 않다.”

 유창한 한국어로 맥아더 장군을 보좌하며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뒤 그는 해병대로 보직을 바꿔 서울 탈환에 나섰다가 인민군 매복조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

 그의 숭고한 사랑에 감명 받은 미국 감리교인들은 아버지 윌리엄 얼 쇼가 공동창립한 대전감리교신학교(현 목원대)에 ‘윌리엄 해밀턴 쇼 기념교회’를 건립했다.

 그의 부인은 남편 잃은 슬픔 속에서도 하버드대 박사 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와 이화여대 교수와 세브란스병원 자원봉사자로 평생을 바쳤다. 아들과 며느리도 하버드대에서 한국사로 박사학위를 받고 내한해 장학사업과 한·미 학술교류에 힘썼다.

 화제를 바꾸어 본다. 미국에 많이 살고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의 조국인 이스라엘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공부를 하고 미국에서 훌륭한 직업을 소유한 사람들도 조국에 전쟁이 났기에 참전을 해 조국을 구하겠다는 기사는 많이 읽었다.

 이는 우리 이민자들에게 보통의 일로 받아들인 지가 오래 되었다. 그런데 미국인이 그 것도 미국의 중상류사회에 속한 분이 자기가 출생한 나라가 조국이라며 모든 것 팽개치고 전쟁에 참전 목숨을 버린 것은 해외에서 살아가고 있는 8백만 동포들에게 큰 귀감이 되리라는 생각이다.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며 나라는 존재는 나를 낳아준 조국을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을 하니 부끄럽고 죄스러움에서 몸살을 앓을 것만 같다. 나대로 알량한 졸견은 조국을 떠날 때 나 한사람이라도 조국을 떠나면 내가 밥줄을 달고 있던 직장을 다른 어떤 분이 갖게 되어 실업자 한사람이라도 구제한다는 생각.

 캐나다에 정착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조국과 동포사회를 위한다며 숱한 감투를 쓰고 뛰어다녔던일. 나의 격에 맞지 않는 해외동포문학상을 제정 십수년을 해외동포들의 정서함양과 이민 2.3세들에게 우리 글과 말을 승계함에 일조한다는 명분, 남들이 들으면 웃고 웃을 일이다.

 그러나 나대로의 자부심은 그 어떤 일도 어느 누구에게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나의 능력껏 성실히 희생하며 봉사했음이라 할까!. 이 얼마나 황당한 요설인가를 생각하며 오늘 내가 이 곳에서 안주하고 있음은 조국이 있었기에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넘기며 진솔한 마음의 옛적 시 한편을 남긴다.

‘혼자서 왔던 길이라고/ 내 어이 말할 수 있으리/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던 길인데 /언제나 가야할 길은 앞에 있기에/ 어떤 이는 자가용 비행기 타고 날고/ 어떤 이는 요트를 타고 대양을 건너는데/ 나는 그 어느 것도 잡지 못한 채/ 부럽지 않는 삶을 살아 왔음을/ 누군들 알까 후회하지도 않았거늘/

그리운 이여// 사랑하는 이여// 나 이제 말 하노라// 고난과 숨막히는 서러웠던 길// 서녘하늘과 사람들 틈에서// 그렇게 살아온 것도// 행운이라고//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적요의 달빛으로 내리는// 이 밤을 너는 모르리//              <민초 이 유식 퇴고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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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선호 칼럼>

6.25 전쟁과 캐나다군 파병

송선호(재향군인회 캐나다동부지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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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유엔기념공원

▲부산 유엔기념공원

1) 6.25 당시 배경

대한민국 5천년 역사 중 조선시대 이래 피해가 가장 크고 치열했던 전쟁을 꼽으라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6.25 전쟁을 꼽을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외국침략에 의한 전쟁이었다면 6.25전쟁은 동족간의 전쟁 이었습니다. 36년간의 일제침략에 의해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겼다가 1945년 8월15일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과 연합군의 승리로 대한민국은 드디어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2년도 안된 1950년 6월. 대한민국은 모든 점에서 어렵고 부족했습니다. 1950년 6월25일 새벽4시.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으로부터 소련제 T-34탱크 242대 원조를 받고, 일요일 새벽에 남침을 시도 하였습니다.

탱크 한 대 없던 남한은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었습니다. 북한군은 탱크를 앞세워 남으로 남으로 침공하였고, 국군은 낙동강까지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UN의 안전보장 이사회에서는 북한의 남침을 민주주의에 대한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16개국의 UN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50년 6월25일부터 휴전을 한 1953년7월27일 까지 3년1개월2일 동안 싸운 결과 한반도는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2)캐나다군의 참전경위

1950년 6.25전쟁은 민주주의 자유진영에 대한 공산주의의 침략전쟁 이었습니다. 그 당시 캐나다는 한국에 대표부조차 두지 않았던 나라였으나 평소 자유를 사랑하고 세계평화를 추구하여 왔기에 북괴군의 침략을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캐나다는 북괴군의 침략을 어느 나라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미국과 UN의 행동에 적극 동조 하였습니다.

1950년 6월30일 개회 중이던 제21차 하원회의에서 전 의원들이 한국전의 사태를 보고받고, UN결의에 따른 파병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어떠한 정부의 조치도 적극 지원한다"고 만장일치로 결의 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부뿐 아니라 의회에서도 한국파병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날 의회에서 Louis St. Laurent수상은 "캐나다가 UN의 결의를 이행하는 데에 참여하는 것은 그 목적이 어떤 한 국가를 상대로 하는 싸움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UN의 통제와 권위 밑에서 평화회복을 위한 집단 안보활동의 일부를 캐나다가 담당하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말함으로써 한국에 파병하는 의미를 분명히 했습니다.

(3)지상군(육군) 파병의 애로점

해군과 공군 참전문제를 비교적 손쉽게 결정할 수 있었던 캐나다 정부도 지상군의 파병문제를 결정하는데 쉽지가 않았습니다. 당시 캐나다는 미국이나 영국과 달리 극동에 주둔하는 지상병력도 없었으며, 1950년 6월말 정규 육군이 고작2만369명 뿐이었습니다. 보병부대는 형식상 3개 연대가 있었다고 하지만 각 연대의 보유병력이 1개 대대에 불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파병을 하자고 하니 Broke Claxton 국방장관을 중심으로 수 차례 육군수뇌회의를 개최하였으며 번번히 결론을 얻지 못하고 시간만 끌었습니다. 정부는 7월20일 미국 정부로부터 UN군에 파병할 1개 여단규모의 파병요청을 받고도 회답을 미룰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정부의 태도에 국내의 여러 신문은 그 무기력을 비난하고 UN의 헌장에 보다 충실해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정부는 8월7일 마침내 육군부대의 파병을 결정하고 이날 저녁 Laurent 수상은 전국 라디오 망을 통하여 이 결정을 발표 하였습니다.

"캐나다 정부는 한국에서 싸우고 있는 UN군에 파병할 1개 보병여단을 창설 하기로 결정하였으며, 동시에 이에 필요한 요원을 전투경험이 있는 퇴역장병들 가운데서 선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캐나다 육군당국은 결정발표 다음날인 8월8일부터 한국행 "캐나다 육군 특별부대"라는 가칭 밑에 요원모집 에 착수하고 선발된 지원병들은 국내의 3개 기존부대에서 기초훈련을 분담 실시토록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11월 초순에는 각 연대에서 1개 대대식 모두 3개 대대가 편성 되었으며 이들은 각각 열차 편으로 집결지인 미국의 Fort Lewis 기지로 출발 하였습니다. 11월21일 3개 대대가 모두 한곳에 집결하자 초대 여단장으로 임명된 J.M. Rockingham 준장의 지휘하에 극동 출발을 위한 제반 준비를 시작 하였으며 "캐나다 제25여단" 이라는 정식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4) 한국전 참전 첫 부대(PPCLI 연대 2대대)

캐나다 제25 여단의 준비과정에 많은 문제가 발생 하였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전 상황의 급변 이었습니다. UN군의 인천상륙작전 뒤에 10월 중순으로 접어들자, 그처럼 캐나다군 급파를 요구하던 UN 당국이 평양함락은 물론 11월 하순에는 압록강까지 진격하게 되자 UN군 장병들은 다가오는 성탄절에는 다들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였습니다.

실제로 군 수뇌부들은 한국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결과 캐나다 정부는 계획된 여단 병력 중 우선 1개 대대만을 파병하기로 결정하고 잔여병력은 미국Fort Lewis 기지에서 계속 훈련하는 한편 한국전 상황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하였습니다.

이 결정에 따라 캐나다 정부는 제 25여단의 3개 보병대대중PPCLI(Princess Patricia's Canadian Light Infantry) 연대의 제2대대를 제1차 파병부대로 지정하고 11월5일 미국선박인 Private Joe P. Martinez호 편으로 시애틀항을 출발 하였습니다.

주력인 여단병력을 남겨놓은 채 출항하게 된 PPCLI 제2대대 장병들은 싸우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떠나는 것과 같은 가벼운 기분으로 극동행 선박에 올랐고, 23일간의 항행 끝에 1950년 12월18일 918명이 부산행에 도착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이 북한군과 합세하여 압록강을 넘어올 줄은 아무도 예측 못했습니다.

(5) 6.25 전쟁의 피해 현황 및 우리의 마음가짐

남북한을 통틀어 전쟁의 피해는 너무도 컸습니다. 국토는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피해는 1)군인 전사상자, 실종자: 62만명, 2)민간인 사상, 부상, 실종자: 99만명, 3)유엔군 사상자: 15만명, 4)이산가족: 1천만명.

북한 피해는 1)북한군 사망, 실종자: 64만명, 2) 민간인 피해자: 150만명, 3)중공군 사망 및 실종자: 97만명, 4)북한 산업시설: 대부분 파괴.

캐나다군 피해는 1)사망: 516명, 2)부상: 1212명, 3)참전자: 2만6791명.

6.25전쟁은 세계 전쟁 역사상 유일하게 모든 대륙에서 군인을 파병하여 우리를 도와 주었습니다. 아시아(터키, 태국, 필리핀), 유럽(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브르크, 그리스), 아프리카(남아공, 이디오피아), 북아메리카(미국, 캐나다), 남아메리카(콜롬비아), 오세아니아(호주, 뉴질랜드).

아마도 UN 16개국의 참전용사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입니다. 한국전쟁으로 남북한 250만명이 죽거나 실종되었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저 주어지는 자유란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는 피의 값으로 산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희생하신 분들의 그 고귀한 희생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6.25전쟁 직후 대한민국은 인도 다음으로 세계에서 못 사는 나라였습니다. 필리핀, 태국은 물론 북한보다도 못사는 나라였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IT산업, 대학진학률, 반도체, 핸드폰, 조선소 등이 세계1위의 나라가 되었고, 세계경제규모 10위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6월 호국의 달을 맞이하여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대한민국을 구하려다 생명을 바친 수많은 젊은이들과 참전용사분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부산 유엔묘지에 가면 UN참전국들의 많은 젊은이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이들의 희생으로 이룩한 오늘의 대한민국, 이제는 우리도 그분들께 은혜를 갚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우리는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들의 희생과 고마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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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주총리 집앞서 식칼 소동

*<온주총리 자택 앞서 식칼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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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밤 덕 포드 온주총리의 에토비코 자택 앞에서 대형 식칼 든 괴한이 고함 지르며 난동 부리다 출동한 OPP에 체포…

별다른 피해는 없음…

포드 총리 집 앞에선  심심찮게 시위가 벌어짐…

https://www.cp24.com/news/man-wielding-large-butcher-s-knife-arrested-outside-premier-doug-ford-s-etobicoke-home-1.5480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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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샤뱅크어레나에 대형 백신 클리닉

*<오늘의 코로나> 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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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타리오 신규확진자 270명, 사망 3명, 양성률 2.5%...

토론토 47, 워털루 44, 필 42, 욕 22…

토론토 스코샤뱅크어레나에 초대형 백신 클리닉 설치, 27일(일) 하루동안 1만명 접종 계획…

https://www.cp24.com/news/scotiabank-arena-becoming-covid-19-vaccine-pop-up-next-weekend-10-000-doses-available-1.5478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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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시인의 인생길 산책 82

<행복을 찾는 길은 2>

  행복이란 무엇일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 추상적인 두 글자에 잘 살았다 잘 못 살아 가고 있다 성공을 했다 그 사람 참 남 보기에 멋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부럽게 느껴진다는 수식어를 붙인다. 이 추상적인 행복이란 길을 찾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나의 삶은 잘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어떻게 살아 왔는가. 뒤를 돌아 보지는 말고 앞만 보고 아름다운 꿈과 이상을 추구하며 살아 가고자 하지만 뒤 돌아 보지 않고 살아 갈 수 없는 우리네 생존을 가끔 반추를 하며 허탈한 웃음을 지을 때가 있다.

 우리네 인생이란 과거를 반추하기에 아름다운 미래를 구상 할 수 있으리라. 과거를 잊어버리고 살아 갈 수만은 없는 것이 생존의 길이지 않는가.

 나대로의 행복의 비결은 세계 제일의 부자인 "월 마트 창업자 샘 월튼"도 아니고 "변 강쇠"가되어 "양 귀비"와 아름답게 하루 저녁을 보내는 것도 아니다. "그져 행복이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행복을 찾는 길은 내 마음가즘에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또한 행복이란 구하거나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불만을 없에고 욕망을 절제 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즉 사랑이 있으면 행복이 오고 행복이 있으면 사랑이 올 수 있으리라 나아가 만인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이는 행복중 행복한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명예 사랑 돈 이 모두가 자기만족의 범주에 있기에 남과 비교할 필요는 없이 앞만 보고 자기 삶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길이 우리 같은 민초들의 행복론의 범주라는 생각을 해 본다 또한 무소유가 행복의 근원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 속에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수필집을 탐독하며 스님같은 분이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분이라는 생각을 한적도 있었다.

 끝으로 무소유의 행복론을 제창하며 무소유라는 자작시 한편을 남겨볼까 한다.

<<인생살이 다 털어 버리고 나면/모든 것이 내 것인 것을/파아란 하늘에 눈물 떨구며 /내 마음 담그고/깜짝 놀라 뒤를 보면/무한의 서러움/꿈 속을 걸어가네/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황혼의 서녘하늘/두눈 부릅뜨고/찢어져 내리는 눈물/ 내 죽어 묻힐 행복길 만리/ /죽어 간 영혼 버리고/우리가 살아 왔다는/내가 너처럼 행복했다는/ /침묵 속의 피안/내 몸을 난자하는/ 애증의 파도여/>>

민초 이 유식 시인 2021년 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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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 높은 원주민 기숙학교

*<캐나다의 부끄러운 역사 원주민 기숙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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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주에 이어 온타리오도 원주민 기숙학교에서 집단 학살된 어린이 유해 발굴사업 추진…

덕 포드 총리, 3년간 1천만 달러 들여 유해발굴-희생자 추모사업 등 지원 계획 발표…

온주는 1991년까지 총 18개의 원주민 기숙학교가 운영됨…

https://www.thestar.com/politics/provincial/2021/06/15/ontario-government-giving-10m-to-help-locate-unmarked-graves-of-indigenous-children-who-died-at-residential-school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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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 이유식 시인의 인생길 산책 81

<행복을 찾는 길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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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이 인간에게 주신 위대한 선물은 눈물과 웃음이라 한다. 이 말은 눈물에는 치유의 힘, 웃음에는 건강과 희망이 숨쉬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기쁠 때 몸 안팍으로 쏟아지는 큰 행동이라 한다. 엔돌핀의 극치는 우리의 건강을 강건하게 해주는 이 즐거움은 인간에게 가장 값신 행복이리라. 근래에는 엔돌핀의 4천배를 능가한다는 다이돌핀이라는 것이 인체에 형성되어 있기에 이 다이돌핀을 토해낸다는 것은 힘도 들지만 웃음의 즐거움의 극치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행복의 극치를 이루기 위하여서는 다이돌핀을 어떻게 생성하느냐하는 마음가짐과 뇌에서 작동하는 몇 억만분의 일의 스위치가 작동을 하는 즐거움의 발휘 이 때에 인간에게는 최대의 행복이 주어진다 한다.즉 남녀가 섹스를 즐길 때 남자는 10초에서 12초사이의 홀몬을 사정할 때의 즐거움 여자는 105초에서 115초 사이의 쾌감, 이 쾌감이 즐거움의 극치 다이돌핀의 발산이라 한다.

 내가 읽은 글 중에서 행복은 누리고 불행은 버리는 것입니다/소망은 쫒는 것이고 원망은 잊는 것입니다/기쁨은 찾는 것이고 슬픔은 견디는 것입니다/건강은 지키는 것이고 병마는 벗하는 것입니다/사랑은 끓이는 것이고 미움은 삭이는 것입니다/ 가족은 살피는 것이고 이웃은 어울리는 것입니다/자유는 즐기는 것이고 속박은 날려 버리는 것입니다/

 위의 글 중에서 지금 나에게 가장 절실하게 파고드는 것은 건강은 지키는 것이고 병마는 벗하는 것이란 말이다. 이는 실제로 내가 5년째 나의 팔목 퇴행성관절염으로 고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 어느 한 부분이라도 정상이 아니면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가를 절실히 느끼게 한다는 것을 체념을 하지 않고는 알 수가 없슴을 각인해 준다는 말이다

 역으로 기쁨은 행복을 안겨주는데 행복은 과연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일까를 곰곰히 생각하면 황금 명예 사랑 이 모든 것도 나 자신이 만들어주는 것이지 않을까? 생존의 가치 뜻 있는 삶을 영위하는 것 남에게 추앙을 받고 남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이 모든 것 내 자신이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사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과연 행복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한 질의 응답은 참 흥미롭다.시간에 쫓기는 사람에게 어이 그리 바쁘냐고 물으면 대답은 행복을 찾고자. 돈 권력 명예를 가진 사람에게도 물었더니 역시 대답은 행복하기 위하여라는 답이다. 또한 신앙인 에술가 등등에게 물어 보아도 같은 대답을 들을 수 있다는 답이다. 간단한 예이지만 자기의 일에 더 열중하고 세상 하직할 때까지 자기를 전부 투자한 사람들이 바라는 답은 무엇일까? 그 답은 행복이란 것을 맛 보고자 했지만 어느 누구도 영속적인 행복을 맛 보지 못하고 종말은 흙으로 돌아갔다는 결론이다. 아멘 아멘. 나무관세음보살, 내 탓이로다 내 탓이로다. –민초 이 유식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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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주 자서전>

뿌리 뽑힌 나무(1)

(A woman from the No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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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주(온타리오 레프로이)

 

*본보는 금주부터 김민주씨의 탈북 수기 <뿌리 뽑힌 나무>를 연재합니다. 숱한 죽을 고비를 넘나들며 탈북에 성공해 중국과 한국을 거쳐 캐나다에 도착해 살아가기까지 그녀가 겪어온 고난 극복의 눈물겨운 여정을 통해 한인 이민 독자들께 꿈과 용기를 선사하길 기대합니다-편집자 주    

 

<머리말>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터라 당황했고 얼른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심각하게 생각을 해보았다. 과연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내가 북한과 중국, 남한을 거쳐 드디어 캐나다에 정착하여 살고는 있지만 내가 캐네디언은 아니다. 그렇다고 남한사람이라고 하기엔 뭔가 많이 빈약하다. 그럼 나는 북한 사람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아무리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북한 사람이 맞다.

 내가 어디를 가든 어디에서 살든 나의 뿌리는 북한이다. 북한과 중국, 한국을 거쳐 드디어 캐나다에 정착하면서 그 나라들의 언어와 풍습,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들과 같아지려고 노력했으나 아무리 해도 절대 그들처럼 될 수 없었다. 내가 북한이라는 나라에서 뿌리를 내리고 해외를 떠돌며 그 가지와 열매를 맺는 모든 과정이 정말 쉽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지나온 내 삶의 뿌리를 조금씩 파헤쳐 보려고 한다.

 내가 살았던 북한은 김일성과 김정일을 이어 김정은이 3대 세습통치를 하고 있는 나라이다. 사람만 바뀌었을 뿐 체제와 통치 시스템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북한 주민들의 삶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평생토록 어떻게 국가에 의해 철저히 관리되고 감시 통제되고 있는지, 왜 아직도 북한 인민의 생활은 김일성 시대보다 점점 더 쪼들리고 절대빈곤에 시달리고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이해가 되길 바란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쓰면서 망설였다. 내가 유명인도 아니고 성공한 위인도 아니며 더구나 요즘 유행하는 SNS조차 하지도 않는 내가 자서전을 쓰다니, 과연 누가 내 지나온 이야기를 읽으려고 할까? 탈북 엘리트들이 펴낸 수기를 읽어본 적은 있지만 사회 밑바닥까지의 삶을 경험한 나와는 다른 이야기들이었다.

 주변에 어떤 캐네디언들은 북한에 대해 아주 큰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대답을 하면 그 대답에 대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 방대하고 심각한 북한의 실상을 사실 한두 시간으로 다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의 자서전을 통해 ‘신비의 요지경’, 폐쇄국가, 캄캄한 베일에 가려져 있는 가장 비밀스러운 국가 북한에 대한 세상사람들의 이해를 조금이나마 도모하고자 한다.

<제1장 나의 소녀 시절>

1. 고향 평양

 나는 1972년 북한 평양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6살까지 살았다. 하여 평양에서 보냈던 기억은 한정적이다. 그때는 거의 매일 공습경보(전쟁시 공습경보에 대비한 훈련)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를 자장가 소리처럼 들으며 자랐다. 내가 사는 한반도는 전쟁을 잠시 멈춘 정전 협정 상태였기 때문에 전쟁에 대비한 훈련은 삶의 일상이 되었다.

 밤에 전기가 끊기고 사이렌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너무 무서워서 울음을 터뜨리면서 엄마 품을 파고들었던 기억이 난다. 전쟁이 언제 다시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대피 훈련, 주민소개훈련, 폭격에 대비한 불빛 막이 훈련은 일상이었다. 북한이 1973년에 1차적으로 완공한 평양 지하철은 수도의 교통 문제 해결과 함께 전쟁이 나면 주민소개 및 대피소로 활용할 목적으로 지하 100∼150M로 깊숙이 건설되었다.

 아버지는 기계공장 기사로 근무하셨고, 엄마는 고등중학교 국문학 교사였다. 부모님 두 분 다 노동당원이셨다. 북한에서 지식인들은 입당이 무척 어려웠는데 입당을 하려고 5~7년 혹은 10년까지도 온갖 어렵고 힘든 일에 앞장서며 남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해야 당원이 될 수 있다. 노동당원이 된다는 것은 그 사회의 핵심분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의미다. 당원만이 사회적인 지위에 오를 수 있고 북한에서 말하는 소위 “사람 축”에 낄 수가 있다.

 결혼할 때 신랑이 비당원이라는 것은 큰 흠이 된다. 비당원들은 결혼대상자를 선택할 때 부족한 사람 취급을 당하거나 자식들 앞에서 부모로서 권위가 위축된다. 우리 부모는 당과 나라를 위해서 잠자는 시간 빼고 나머지 시간은 직장에서 고군분투하였다. 자녀들은 방치하였고, 가정은 뒷전이었다. 주말이나 명절에도 온 가족이 놀러 가거나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낸 적이 한 번도 없다. 부모님들은 아침 7시에 나갔다가 밤늦게 10시 넘어서야 집에 들어오셨다. 차디찬 냉방에 우리 네 형제가 여기저기 쓰러져 잠에 들면 밤 10시가 넘어 들어온 엄마가 흔들어 깨운다.

 나이 60에 이르러서도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은 물론 돈 한푼 없이 빈털터리였다. 정년퇴직 후에 엄마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위해서 자신들의 아까운 청춘과 인생을 다 바쳐 헌신하고 충성한 것을 몹시 후회하셨다. 나의 부모님만이 아니라 그 시대의 모든 어른들은 다 그렇게 살아왔다.

 나에게 두 언니와 남동생이 있었는데 7~8살 되던 큰 언니가 학교가 끝나면 탁아소에 들려서 나와 동생을 집에 데려오고 손발을 씻기고 먹을 것도 주었다 내가 4살 적에 둘째 언니가 내 발을 씻겨 준다며 펄펄 끓는 물을 바가지로 떠서 다리에 부어버려서 화상을 입었다. 둘째 언니도 나보다 한 살 더 많은 5살짜리 꼬맹이라 끓는 물에 화상을 입는지를 알 턱이 없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나의 발등과 다리에는 아직도 그 화상 흔적이 남아 있다.

 한번은 큰 언니가 8살 때 학교에서 시험공부를 밤 10시에 끝내고 탁아소에 있는 나와 동생을 엄마가 당연히 데려갔을 거라고 생각하고 집에 왔더니 엄마도 막 그때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엄마는 언니가 탁아소에서 동생들을 데려오지 않았다고 너무 혼내어 큰언니는 울면서 그 늦은 밤에 탁아소에 가서 우리를 데려왔다고 한다. 그 시간까지 우리만 탁아소에 남아 보육원들이 우리를 너무 싫어했다. 우리 때문에 퇴근을 못하기 때문이다.

 당시 평양에서는 석유곤로(버너)로 밥을 짓거나 구멍탄(연탄)으로 온돌도 덥히고 밥도 해 먹었다. 연탄이 떨어지면 석유로 밥을 해먹었는데 온 집안에 석유 냄새가 진동하고 온돌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나마 석유까지 떨어지면 밥을 해 먹지도 못하고 배고파도 참고 엄마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남자애들처럼 모험을 좋아했다고 한다. 어느해 여름 방학이었다. 탁아소도 방학이라 문을 닫았는데 엄마는 4살 된 나와 두 살배기 동생을 집에 가두어 놓고 문을 잠그고 출근했다. 저녁에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나와 동생은 하루 종일 집안에서 놀아야 했다. 나는 심심하고 뭔가 놀 거리를 찾다가 높은 책상 위에서 엄마가 매일 아침 얼굴에 바르는 크림통을 발견했다. 그것을 얼굴에 바르면 어떻게 될까하고 갑자기 궁금해진 나는 책상 위에 직접 올라가서 얼굴에 발라 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책상이 너무 높아 나는 의자를 놓고 올라가 또 책 꽃이 위에 있는 크림통을 잡는 데 성공했다. 뚜껑을 열어봤더니 하얗고 부드러운 크림에서 처음 맡아보는 신기한 향기가 풍겨왔다. 나는 손가락을 넣고 휘젓다가 얼굴에도 바르고 바로 그 옆에 있던 손거울도 집어서 들여다보다가 별로 재미가 없어서 그만 내려오려고 하였다. 그런데 의자를 밟고 내려가지 않아도 한번에 뛰어내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도 그 장면은 기억이 나는데 나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하나, 둘, 셋에 책상 위에서 바로 바닥으로 뛰어내렸는데 책상이 흔들리면서 크림통이 먼저 땅에 떨어지고 박살이 나 버렸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위에 무릎을 찍으면서 많은 유리 조각들이 다리에 박혀버렸고 피가 흘러내렸다. 문이 밖으로 잠겼기 때문에 우리는 이웃에 도움도 청하지 못하고 학교에 간 언니들이 귀가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나는 학습장(노트) 종이를 뜯어 다리에 감고 실로 동여매고 언니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오후 4시쯤에 큰언니가 돌아와서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며 얼른 엄마가 일하는 학교에 날 데려갔다. 그리고 나는 병원에 바로 실려 갔는데 의사 선생이 살에 박힌 무수한 유리 조각들을 다 뽑아내고 엄청나게 벌어진 상처를 실로 끄러 맸는데 칼을 잡고 있던 의사의 모습도 기억이 난다. 4살밖에 안 되는 애가 아프다고 울지 않고 견디는 것을 보고 의사 선생님이 크게 놀랐다고 한다. 나는 상처가 아픈 것보다 엄마가 아끼던 크림통을 박살 내버려서 엄마한테 혼날 것이 더 무서웠고 걱정이 되었다. 그 당시엔 크림 한 통 사기가 힘들었고 한 통으로 아끼고 아껴서 오래오래 써야 했기 때문이다.

 태양이 쨍쨍 내리쬐는 7월 한 여름날, 집안에서 동생과 놀다가 심심해진 나는 장롱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빨간색 겨울 자켓을 발견하였다. 큰 언니부터 물려 입던 여자 옷이었는데 내가 작아서 내 남동생이 물려 입게 된 것이다. 점심시간에 나는 빨간 겨울 자켓을 동생에게 입히고 아래는 벌거벗은 채로 동생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그날은 어쩐 일로 문이 밖으로 잠겨 있지 않아 우리는 집을 나설 수 있었다.

 걸어서 20분 정도에 있는 학교에 다다르니 마침 점심시간 중간 체조 시간이었다. 온 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이 노래에 맞춰 인민보건체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동생 손을 꼭 잡고 줄지어 있는 학생들 사이로 걸어가다가 앞에서 체조를 하고 있는 엄마를 보고 기뻐서 소리쳤다. “엄마. 나 의덕이 데려왔어”

 나는 엄마가 길을 잃지 않고 용케 잘 찾아왔다고 칭찬할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우리를 보고 엄마는 너무 당황하여 얼른 우리들을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한여름에 겨울 옷을 입고 엉덩잇살을 다 드러내고 아장아장 걸어오는 3살짜리 남동생을 보며 학생들과 교원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그때부터 내 동생을 모르는 학생이 없었다.

 북한에서는 해마다 모내기철인 5월과 가을철 10월에는 전국의 학생들이 농촌 지원을 나간다.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에서 합숙을 하며 바쁜 농번기 일을 돕는다. 엄마도 맡은 학급 학생들을 데리고 한 달간 농촌 현지에서 합숙을 해야 했는데 동생만 데리고 가고 나는 동네의 제일 무서운 할머니에게 맡기곤 하였다. 그 무서운 할머니는 일제시기에 신통방통 소문난 무당이었는데 일본인들도 점 보러 찾아올 정도로 점을 잘 봤다고 한다.

 그러다가 김일성이 정치를 하면서부터 종교와 미신을 타파한다고 하면서 모조리 청산하여 함부로 점이나 무당 노릇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자식도 남편도 없이 홀로 살아온 그 할머니는 생김새가 너무 험악하고 무서워 공포와 두려움의 대명사였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무당할멈한테 데려간다고만 하면 울음을 뚝 그쳤다고 한다. 그때 엄마는 내 간식용으로 앙꼬빵을 할머니에게 맡겨 두었는데 할머니는 숨겼다가 매일 1개씩만 꺼내 주었다. 너무 맛있어서 더 먹고 싶었지만 엄마가 데리러 올 때까지 먹어야 한다며 더 주지 않았다.

 나는 몰래 그 할머니가 어디에 숨겼는지 지켜보다가 혼자 꺼내 먹었는데 그만 들키고 말았다. 할멈이 나를 혼냈지만 나는 무서워도 하지 않고 엄마가 날 먹으라고 준 건데 왜 욕을 하냐고 대들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때 그 할멈은 나에 대해 어떤 예언을 해주었는데 엄마는 미신을 믿으면 반혁명분자로 몰아가던 시기라 귀담아듣지 않아 훗날 몹시 후회를 하셨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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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진자 감소, 사망자 증가

*<코로나 뉴스 종합>6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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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thestar.com/business/2021/06/09/feds-to-lift-14-day-quarantine-requirement-for-fully-vaccinated-canadian-traveller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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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시니어 앙상블 연주회

*<주말 공연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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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한인시니어 앙상블 연주회(온라인)가 주말인 6월5일(토) 오후 8시에 열립니다.

조상두 목사가 지휘하는 이 공연은 75세 이상 시니어들이 모여 그동안 갈고닦은 수준높은 기량을 펼쳐보일 예정입니다.

특히 참가자들은 대부분 성인장애인공동체에서 봉사하는 분들로, 나이에 관계없이 노력하면 된다는것을 확인시켜드릴 것입니다.

<공연 음악> 좋으신 하나님, 작은 불꽃 하나가, 나 주의 믿음 갖고, 기다리는 마음, 오빠 생각, 매기의 추억, 황성옛터  

*유투브를 통해 가족들과 함께 많이 시청해주시기 바랍니다. 위 포스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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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 시단

<봄 비가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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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의 광야에 봄 비가 내리네

빗소리에 들려오는 꽃잎 피어나는 소리

멀리서 보이는 아름다움이어라

 

빗소리 따라 젖어드는 얼굴 하나

나의 창문을 두들기는 애잔한 웃음소리

꿈은 살아서 창공을 날고 있고

보이는 것은 허무한 얼굴 하나

 

내 마음은 너의 마음

너의 마음은 방황하는 외진 길 언덕에서

눈물을 흘리며 사랑을 속삭이며

진종일 정처없이 비는 오고 있는데

가야할 길도 와야 할 길도 없는 종착역에서

휘날리는 봄비는 누구를 찾는가

 

외롭다 말하지 말라 빗소리여

시공(時空)의 공간을 파고드는 나의 눈물은

텅빈 방 베갯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여라

 

내 이상의 사랑은 유랑을 하고

봄비와 고독의 창공을 원망하랴

순애의 봄비가 소리없이 내리네             

-민초 이 유식 2021년 5월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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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토론토 탈북여성 자서전 출간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내 인생 스토리”

40대 탈북여성의 기구한 삶 다룬 자서전 출간 

▲저자 김민주 씨

▲저자 김민주 씨

토론토 인근 김민주씨 저 <뿌리뽑힌 나무>  

 토론토 인근 소도시에 거주하는 40대 탈북여성이 ‘아주 특별한’ 자서전을 펴냈다. 책 제목은 <뿌리뽑힌 나무>, 영문제목은 ‘A woman from the No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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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뽑힌 나무> 책 표지

 이 책은 생과 사의 고비를 수없이 넘나들면서도 그때마다 기적처럼 살아난 한 가냘픈 여성이 자유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들려주는 한편의 감동 드라마다. 각 장면마다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삶의 순간들이 한편의 스릴러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저자 김민주씨는 1972년 평양에서 태어나 6살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다 1976년 판문점 도끼사건을 계기로 평양시에서 출신성분이 불량한 자들을 대거 축출할 때 6.25 전쟁 당시 행방불명된 큰아버지 때문에 온가족이 함경도의 지방으로 강제이주 당했다. 이때부터 그녀의 가시밭길 인생이 시작되고 생존의 벼랑끝에 몰렸다.

 그녀는 북한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핏덩이 어린 아들을  압록강 푸른 물결에 잃었고 그녀 자신도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겨야 했다. 겨우 탈북에 성공했으나 중국의 벽촌에서 또다른 궁핍과 멸시를 받으며 살다가 드디어 꿈에 그리던 남한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토록 갈망하던 남한은 그녀가 적응해 살아가기엔 결코 녹록치 않았다. 특히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운 아들(현재 대학생)의 교육문제와 세계시민으로서의 더 큰 꿈을 이루어 가기 위해 그녀는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

 책은 제1장 <나의 소녀시절>부터 시작해 제2장 <도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 제3장 <우리의 삶은 전쟁터였다>, 제4장 <생사를 넘나들며>, 제5장 <장백산>, 제6장 <인생의 제2막>, 제7장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 제8장 <뿌리 내린 나무> 등으로 구성돼있다.

 김씨는 자서전의 영문판도 준비하고 있다. 책을 현재의 남편에게 읽게 하고 싶어서다. 포르투갈-캐네디언인 현 남편은 김씨 모자(母子)가 캐나다 이민을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은인이기 때문이다.

 책은 자가편집 플랫폼 부크크(BOOKK)에서 전자책으로 편집됐다.

-정가 2만2,300원.

-책 구입 문의: https://www.bookk.co.kr/book/view/111237  

-알라딘, 교보문고, Yes 24 를 통해 온라인 주문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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