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의 추억

노을 진 한산섬에 갈매기 날으니/ 삼백 리 한려수도 그림 같구나/ 굽이 굽이 바닷길에 배가 오는데/ 님 마중 섬 색시의 풋가슴 속은/ 빨갛게 빨갛게 동백꽃 처럼 타오르네/ 바닷가에 타오른다네 (이미자 ‘삼백리 한려수도’)

경남 통영은 예술의 도시다. 박경리, 유치환, 김춘수, 윤이상, 전혁림 등 이름만으로도 묵직한 문화계 거장들이 통영에서 태어나 창작혼을 불태웠다. 시인 정지용은 1950년 통영기행문에서 “금수강산 중에도 모란꽃 한 송이인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고 했다. 점점이 떠 있는 570개 섬들이 작가들의 감성에 불을 지핀 것일까, 부드러운 산세와 호젓한 항구가 무한한 상상력을 키워준 것일까.

박경리: 한국 대하소설의 기념비적 작품인 《토지》를 집필한 한국 문학계의 거장.김춘수: '꽃' 등의 작품을 남기며 한국 순수시의 지평을 넓힌 시인.유치환: 《깃발》, 《행복》 등을 통해 강인한 생명력과 서정성을 노래한 청마 유치환 시인.음악 및 미술윤이상: 동양과 서양의 음악 기법을 성공적으로 융합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현대 음악의 거장 작곡가.전혁림: 통영의 쪽빛 바다와 섬, 한국적인 전통 문양을 화폭에 담아낸 '바다의 화가'.역사 및 체육이순신: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고 수많은 해전을 승리로 이끈 구국의 영웅.

통영에서 태어난 소설가 박경리(1926~2008)는 살아생전 “통영 사람에게는 예술가의 DNA가 흐른다. 이순신과 300년 통제영 역사가 통영 문화에 오래도록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그의 대하소설 <토지>를 비롯해 <김약국의 딸들> <파시> 등에는 어김없이 고향땅 통영이 등장한다.

어촌마을이었던 통영은 1592년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 이후 커다란 변화를 맞았다. 통영은 조선시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3도 수군을 총괄하는 삼도수군통제영(1593)으로 지정되었고 통제영 본부인 세병관을 중심으로 세련된 도시 면모를 갖췄다. 2년에 한번 한양에서 통제사가 부임할 때마다 서양과 도시 문물이 빠르게 흘러들었다. 전국 8도의 ‘쟁이’란 쟁이는 다 모였다. 통제영 300년 세월이 통영을 나전칠기, 소반, 갓 등의 명산지로 키워낸 것이다.

"나는 한 번도 통영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잔잔한 바다! 가끔 파도가 칠 때에도 초목을 스쳐가는 바람도 나에게는 음악으로 들렸습니다."

작곡가 윤이상 타계 30주년을 맞아 고향 통영에서 그의 삶과 철학을 조명하는 어록 전시회가 최근 개막했다.

통영국제음악재단은 지난 1일부터 오는 12월 31일까지 통영 윤이상기념관에서 윤이상(1917~1995) 선생의 어록전시회 '음표 사이에 숨은 말'을 개최한다.

윤이상 선생의 타계 3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이번 특별전은 그의 생전 말과 글, 인터뷰, 편지 등에서 발췌한 어록을 중심으로 예술가로서의 삶과 철학을 조명한다.

윤이상은 통영 출신으로, 동아시아의 음악적 전통과 서양의 아방가르드 기법을 융합한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하며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았다. 자연과 인간 사회, 이상과 현실을 두루 음악 속에 담아냈으며, 주요음 기법 등 독보적인 작곡법을 통해 '동·서양 음악의 중개자'로 불리며 현대 음악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통영국제음악제가 '윤이상 음악제'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과거 군사정권 시절 덧씌워진 '이념(간첩) 프레임'으로 인한 정치적 부담과, 특정 개인의 이름 대신 범세계적인 '현대음악 중심지'로 도약하고자 하는 음악제의 확장성 때문입니다.구체적인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동백림 사건과 이념 논란: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어 간첩 누명을 썼던 윤이상 작곡가의 과거가 축제 명칭을 정할 때 큰 정치적/사회적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이후 2006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이 사건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확대된 것임이 밝혀졌으나, 보수 진영의 반발 등 때 지난 이념 공세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통영시 차원에서 명칭 사용을 조심스러워했습니다.세계적인 현대음악 축제로의 확장: 특정 작곡가 1명의 이름만 내세우기보다는,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참여하고 교류하는 '국제 음악제'라는 브랜드가 도시의 문화적 가치를 높이는 데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명칭에 대한 타협점과 현재 상황:'통영국제음악제'라는 이름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윤이상의 음악적 업적을 지우려 한다는 비판도 잇따랐습니다. 이에 대한 타협과 절충안으로 다음과 같은 조치들이 이루어졌습니다.통영국제음악제의 핵심 프로그램과 콘서트는 여전히 윤이상의 철학과 주요 작품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윤이상의 이름을 딴 '윤이상 국제음악 콩쿠르'를 매년 별도로 개최하여 그의 음악 세계를 기리고 있습니다.이러한 배경 때문에 공식 명칭은 '통영국제음악제'로 확정되었으나, 본질적으로는 '윤이상을 기리고 그의 음악을 중심에 두는 축제'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1994년 9월 1일 독일 베를린의 윤이상 선생 자택에서 유럽 및 독일 주재 한국 특파원과의 회견이 끝난 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파리에 살고 있는 동양 출신의 한 지인이 찾아왔다. 꾸벅 인사를 한 그는 대뜸 "선생님 드리려고 멸치를 갖고 왔습니다" 라며 종이 꾸러미를 내밀었다.

그 순간 윤이상 선생은 "통영, 통영 멸치!? 아니 이게 정녕 통영 멸치란 말이오?"라고 울음 섞인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은 이내 눈물로 얼룩졌다. 그 지인이 "네, 선생님이 통영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계실 때 제자였던 제 누이가 직접 보낸 것입니다."라고 말할 때, 꿈에도 잊지 못하던 고향, 통영 멸치를 받아 들고 울먹이던 노음악가의 모습에 주변의 특파원들도 모두 숙연해졌다.

- ‘부산일보’ 세계적인 작곡가 고 윤이상 선생님의 기사중에서 -

윤이상 선생님의 고향은 통영입니다. 그 분은 그 먼 독일땅에서 살아오면서 생의 마지막 끝자락을 잡고 계실 때까지 통영 앞바다를 찍은 큰 사진을 벽 한켠에 붙여 놓으셨으며 노후를 통영 바닷가에서 낚시를 즐기며 조용히 지내고 싶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답니다. 마지막 순간 유언하시기를 "고향인 통영에 묻힐 수 없다면... 차라리 베를린에 남겠다" 라고 하셨다 합니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그리움의 대상이지만 윤이상 선생님, 그 분에게 통영은 어떤 의미에서 큰 그리움의 대상이였을까요?

우리는 윤이상 선생님의 이 말 한마디에서 그 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나는 통영에서 자랐고, 통영에서 그 귀중한 정신적, 정서적인 모든 요소를 내 몸에 지니고 그것을 나의 정신과 예술적 기량에 표현해 나의 평생 작품을 써왔습니다. 구라파(유럽)에 체재하던 38년 동안 나는 한번도 통영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물색, 가끔 파도가 칠 때도 파도 소리는 나에겐 음악으로 들렸고, 그 잔잔한, 풀을 스쳐가는, 초목을 스쳐가는 바람도 내겐 음악으로 들렸습니다."

통영은 그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멀리 떠난 아들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그 분도 그러했나 봅니다. 이제는 세계의 유수한 유명 음악가들을 '통영국제음악제'라는 이름으로 이 작은 마을 통영으로 오게 불러놓고서는 정작 자기자신은 끝내 오지 못하고 그 넓은 통영바다 대신, 향기로운 통영의 향토 대신 한줌의 통영에서 퍼간 흙만으로 통영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며 독일 저 먼땅에서 아직도 꿈을 꾸고 계신가봅니다. 나비가 되어 고향으로 향하는 꿈을...

베를린을 근거지로 음악 활동을 한 윤 선생은 1967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과장된 동백림(東伯林·East Berlin)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겪었다.

이후 국내에서는 이념성향과 친북 논란 등으로 제대로 음악성을 평가받지 못했지만, 해외에서는 '동양과 서양의 음악기법 및 사상을 융합시킨 세계적 현대 음악가', '유럽의 현존 5대 작곡가' 등으로 불렸다.

그는 1995년 11월 독일 베를린에서 타계해 가토우 공원묘지에 묻혔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통영시와 외교부 등의 노력으로 유해는 2018년 타계 23년 만에 고향인 경남 통영으로 돌아왔다.

전쟁과 피난, 통영에서의 시작

화가 이중섭은 6·25전쟁 발발 후 원산에서 부산으로 피난했다가 1951년 봄 서귀포로 잠시 거처를 옮겼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정착이 어려워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고, 1952년 늦은 봄 공예가 유강렬의 권유로 통영으로 향했습니다. 이 시기 이중섭은 이미 부인과 두 아이를 일본으로 떠나보낸 상태였습니다. 통영에 머문 기간은 약 2년으로, 이전에 알려진 6개월보다 훨씬 길었습니다.

예술가들과의 교류와 창작 활동

이중섭은 도립통영공예학원 자리에 머물며 김경승, 남관, 박생광, 전혁림 등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전쟁 피해가 적고 자연과 먹거리가 풍부한 통영은 창작 활동에 적합한 환경이었으며, 김용주, 전혁림, 장윤성 등의 화가와 청마 유치환, 초정 김상옥 같은 문인들과도 교류했습니다. 유강렬이 마련한 다다미방에서 그림을 그렸고, 미륵도의 용화사나 도솔선원에서도 머무르며 효봉 스님과도 어울렸습니다.

통영에서의 전시와 문학적 인연

1953년 이중섭은 항남동 성림다방에서 개인전을 열고 <황소>, <부부>, <가족>, <달과 까마귀>, <도원> 등 주요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이 전시에서 시인 청마 유치환은 <달과 까마귀>에 감명받아 훗날 시 「괴변」을 발표했습니다. 같은 시기 성림다방에서는 김상옥의 시집 『의상』 출판기념회도 열렸고, 이중섭은 그림 한 점을 선물로 남겼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남은 흔적과 대표작

이중섭이 머물렀던 건물은 통영 시내 오거리 인근 유료주차장 옆에 있으며, 표지석과 함께 <소> 그림이 담장에 부착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 그는 <흰 소>,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를 비롯해 다수의 대표작을 남겼고, 통영은 그에게 외로움을 견디며 예술에 집중할 수 있었던 자양분의 공간이었습니다.

여행 TIP

이중섭이 머물렀던 건물은 통영 농협중앙회 앞 사거리에서 남쪽 바다 방향으로 약 50m 이동하면 왼편 유료주차장 옆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표지석과 <소> 그림이 담장에 부착돼 있어 위치 확인이 쉽습니다.

이중섭이 개인전을 열었던 성림다방은 현재는 남아 있지 않지만, 통영의 예술사적 장소로 기록되어 있으며 관련 자료를 통해 그 흔적을 되새겨볼 수 있습니다.

전시작 <황소>, <달과 까마귀>, <세병관 풍경>, <통영 앞바다> 등은 통영의 지명과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작품 제목을 알고 실제 장소와 비교해보면 감상이 더욱 풍부해집니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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