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당 이야기

밀가루 두 포대로 시작해 4백여 명이 함께하는 기업으로 성장한

*대전 성심당 본점

기적의 빵집, 나눌수록 커지는 성심당의 60년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리 곁에 불행한 사람을 두고 혼자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

대전역 노점 찐빵집에서 시작된 성심당의 나눔, 그 감동의 스토리

성심당의 시작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장면들로 가득하다. 성심당의 창업자 임길순은 1950년 전쟁통에 함경남도 함주에서 가족을 데리고 남으로 내려온 피난민이었다. 불타는 흥남부두에서 구사일생한 그는 ‘여기에서 살아나면 평생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살겠다’고 다짐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전까지 흘러온 그는 성당에서 받은 밀가루 두 포대를 밑천으로 1956년 대전역 앞에 천막을 치고 찐빵을 만들어 팔았다. 성심당의 시작이다. 60년 전, 노점 찐빵집이 직원 4백여 명이 일하는 대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그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매 순간 눈물과 감동으로 우리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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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정말 이런 회사가 존재할까?

대전 No1. 브랜드, 청년들이 가장 일하고 싶은 회사

경쟁이 아닌 상생을, 독점이 아닌 나눔의 경영. 대학생이 뽑은 대전의 넘버원 브랜드 성심당의 성장에는 다양한 원동력이 있었다. 끝없는 제품 개발과 업계를 선도한 마케팅 전략, 사소한 것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고 본질에 충실하고자 했던 경영철학, 무엇보다 이웃과 상생하고 함께 성장하고자 한 남다른 경영방식이 오늘날의 성심당을 만들었다. 성심당은 지금도 젊은이들이 일하고 싶은 기업, 노동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고 노력한 만큼 성장할 수 있는 비전 있는 회사로 손꼽힌다. 제과업계 최초로 주5일 근무를 도입하고, 전 직원에게 매출을 공개하는 투명경영으로 신뢰를 쌓으며 이윤의 15%는 직원에게 성과보수로 지급하는 회사. 인사고과의 40%는 동료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평가 기준이다.


대전을 지키는 빵장수 로컬 히어로 성심당,

대한민국을 바꾸는 모두가 행복한 경제를 꿈꾸다!

성심당의 건물 외벽에는 수도꼭지 하나가 바깥으로 나와 있다. 매장 앞 포장마차들이 물을 편히 쓸 수 있도록 일부러 바깥으로 설치한 것이다. 포장마차 상인들까지 배려한 성심당은 지역 경제를 위해 대전에서만 만날 수 있는 빵집으로 영원히 대전을 지키는 빵장수로 남고 싶어 한다. 좋은 기업 하나가 어떻게 지역에 기여하고 또 함께 성장하는지를 보여주는 성심당의 사훈은 ‘모든 이가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 손님, 직원은 물론 거래처, 협력업체, 심지어 경쟁사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이’가 행복한 빵집. 이러한 경영철학을 근간으로 성심당은 가급적 지역의 농산물을 사용하고, 항상 신선한 빵을 제공하기 위해 네 시간이 지난 빵은 팔지 않으며 포장재도 친환경 종이 패키지를 사용한다. 또한 서울은 물론 해외에서 끊임없는 러브콜을 받아도 꿈쩍하지 않고 대전을 지키는 빵장수 성심당은 대전 시민의 자부심이자 로컬 기업의 훌륭한 롤모델로, 많은 사랑을 받으며 동네 빵집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저자소개>


글쓴이 김태훈은 일찍이 문화 콘텐츠에 관심이 많아 20대 후반부터 문화정책 분야에서 일했다. 고향 경남 창원의 경남도민일보 문화부 기자를 거쳐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 7년 동안 정책과 홍보, 음악사업팀장 등의 업무를 맡아 문화산업 전반에서 폭넓게 일했다. 2011년부터 경남도민일보와 공동 설립한 지역 스토리텔링 연구소장을 맡아 ‘마산 원도심의 창동 오동동 이야기’를 비롯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2015년에는 여행인문학을 지향하는 ‘또다른세상협동조합’을 설립해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성심당과는 6년 전부터 인연이 생겨 지역 문화와 함께 성장하는 로컬 기업 사례로 관심을 갖고 연구해 왔다. 저서로는 공저로 참여한 <소리바다는 왜>, <스토리텔링 레시피>, <가는 길이 내 길이다> 등이 있다.


주인공 성심당은 1956년 밀가루 두 포대를 자산 삼아 대전역 노점 찐빵집으로 문을 열었다. 이후 60년 동안 "우리 곁에 불행한 사람을 둔 채로 혼자서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는 신념에 따라 나눔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 매월 3천만 원 이상의 빵을 대전 시내 양로원과 고아원 등지에 기부해왔다. 2005년 큰 화재로 위기에 봉착했으나, 직원들과 시민들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2014년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식탁을 위해 KTX로 매일 갓 구운 빵을 배달해서 더 유명해진 성심당은 이제 직원 4백여 명이 함께하는 대전의 자부심이자 대전 청년들이 일하고 싶은 기업 1위로 꼽히고 있다. 무엇보다 ‘EoC(Economy of Communion)_모두를 위한 경제’를 적극 실천, 한국 경제 전반에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는 기업 경영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1. 개요[편집]

성심당(聖心堂)은 대전광역시의 향토기업인 로쏘주식회사가 운영하는 한국의 천주교 계열 제과·제빵점으로, 대전광역시 중구 은행동에 본점을 두고 있다.

대표이사는 성심당의 2대 오너인 임영진(세례명 요셉)[4]이며, 그의 배우자 김미진 이사(세례명 아녜스)[5]와 함께 경영한다.

2. 상호의 의미[편집]

상호의 '성심(聖心, Sacred Heart)'은 '거룩한 사랑의 마음'이라는 뜻으로, 가톨릭교회에서 말하는 예수 성심을 지칭한다. 참고로 가톨릭에서는 예수성심 외에 성모성심도 공경하는데, 한국어로는 둘 다 ‘성심’이라는 말을 쓰나 예수성심은 Sacred Heart라고 하는 반면 성모성심은 Immaculate Heart라고 하므로 성심당의 ‘성심’은 예수성심이다.] '예수 성심'은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성체성사, 수난과 죽음으로 드러난 예수의 사랑의 마음을 가리킨다.

최후의 만찬에서도 예수가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주었고, 이것은 오늘날 성체성사(미사)의 기원이며, 이에 그리스도교 문화권인 서구에서는 빵이 가지는 의미가 다른 음식에 비해 특히 각별하다. 여러 식품 중에서도 빵을 제조하는 성심당은 가톨릭 색채가 짙은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3. 역사[편집]

성심당은 대전(大田)의 문화(文化)입니다.

1956년 대전역 앞 작은 찐빵집에서 시작된 성심당은,

대전 시민의 자부심과 사랑으로

대한민국 제과업계를 대표하는 향토기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우리는 가톨릭 정신[6]을 바탕으로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가치 있는 기업이 되고자 합니다.

또한 '맛있는 빵, 경이로운 빵, 생명의 빵'을 만들어 이웃과 함께

'사랑의 문화'를 이루어 가고자 합니다.

성심당 소개문

성심당의 역사와 일화는 2016년 출간된 『우리가 사랑한 빵집, 성심당』(김태훈 저, 남해의봄날)과 성심당 본점 인근에 위치한 성심당문화원에서 개업 70주년을 맞아 2026년 연말까지 진행되는 70주년 기념전시, 그리고 성심당에서 발행한 『성심당 70년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본 문서에는 성심당의 역사 중 주요한 부분만 소개되어 있지만 상기한 참고문헌에는 성심당의 경영이념과 구체적인 경영사(史), 아울러 대전의 지역사도 어느 정도 망라되어 있기에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참고할 만하다.

3.1. 창업 및 성장기[편집]

고향인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과수원을 운영하던 임길순 암브로시오는 6.25 전쟁 당시 함흥의 유엔군이 철수한다는 소식과 곧 원자폭탄이 투하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듣고 일가족과 함께 함주군을 빠져나와 흥남으로 향했다.[7] 어렵사리 흥남에 다다른 임길순 가족은 메러디스 빅토리 호를 타고 월남하여 거제도에 도착했다.[8]

처음 정착한 거제 장승포에서는 현지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던 천주교 교인의 도움으로 한동안 신세를 질 수 있었으나, 장승포가 피란민을 수용하기에 작은 동네이기도 했고 전쟁통에 혼란스러운 현지 사정에 적응하지 못해 얼마 안 가 이웃한 군항 도시인 진해로 이사를 갔다. 진해로 이사한 뒤에는 냉면 장사를 했으나 재료 부족 등의 문제 때문에 장사가 신통치는 않았다고 한다. 진해에 머무는 동안 아이도 3명이 늘어나 슬하에 7남매를 두었기 때문에 냉면 장사로는 생계를 유지하게 곤란하게 되던 차에, 1955년 6월 철도 운행이 재개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임길순은 더 큰 도시에서 살림을 꾸릴 방도를 찾기 위하여 1956년 가족과 함께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임길순 가족은 열차 고장으로 뜻하지 않게 대전에 내리게 되었다.

대전에 얼떨결에 정착하게 된 채 살길이 막막해 찾은 천주교 대전교구 주교좌 대흥동성당[9]에서 주임 오기선 요셉 신부(1907~1990)[10] 가 구호물자로 배급받은 밀가루 두 포대를 내주었는데, 한 포대는 본인 가족을 위해, 나머지 한 포대로 찐빵을 만들어 대전역 앞에서 천막을 치고 찐빵 장사를 시작한 것이 성심당의 시작이다.[11]

개업 당시에는 대전역 앞 찐빵 노점으로 시작했으나, 터를 잡을 정도로 꾸준히 장사가 되면서 튀긴 도나쓰나 맘모스빵도 파는 등 점점 메뉴를 늘리기 시작했다. 한편 1958년에는 대전역 신역사 건축으로 광장이 재정비 작업에 들어감에 따라 광장에 있던 노점들이 자리를 비워야 했는데, 이때 역전을 떠나 동구 중동 왕생백화점 옆 건물(現 대전중앙시장 입구 부근)에 세를 얻어 점포를 차렸다. 그리고 1962년 대흥동성당 건물이 개축되자 1967년에 점포를 다시 성당 근처인 은행동 153번지(현 성심당 케익부띠끄 자리)로 옮겼다.[12]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임길순은 아이들이 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신앙심을 키우기를 바랐기에 가게를 성당 근처로 옮겼지만, 성심당 홈페이지에 소개된 1960년대 당시 성심당 사진이나 1960년대 무렵 대전광역시 풍경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성심당이 자리를 옮긴 은행동 153번지 일대는 당시 대전의 주요 상권과 동떨어진 지역이었다. 20세기 초 일본인들이 대전에 정착하여 도시를 만들고 광복 후 1970년대 중후반에 이르기까지 대전의 번화가는 대전역을 중심으로 한, 일본인들이 혼마치(本町)라 부르던 정동, 중동, 원동 일대였다. 에펠제과, 뉴욕제과, 태극당[13] 등 여러 빵집들과 극장, 다방, 음식점 등 당시 핫플레이스라 불릴 만한 곳들은 대부분 저 일대에 위치해 있었으며 좀 더 범위를 확장하면 대전역에서 충남도청(현 대전근현대사전시관)까지 이어진 중앙로 대로변이 번화가로 불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임길순은 "성당 옆에 가게를 지어야 한다"며 다른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점포 이전을 고집하였다.#

당시 성심당은 임길순이 사장을 맡고 그의 부인인 한순덕 여사와 장성한 딸들이 카운터를 담당하는 식으로 경영하고 있었으나, 세월이 흘러 1970년대에 이르자 딸들은 차례대로 시집을 가 본가를 떠나고 환갑에 다다른 임길순 부부는 예전처럼 매장을 오랫동안 지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가족들 중에 제대로 제과제빵 기술을 익힌 이는 없었기에 제과점에 걸맞은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기술자를 고용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 기술자들이 오너 일가가 빵을 만들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파고들어 근무 시간에 술을 마시거나 춤을 추러 가는 등의 태업과 함께 수시로 급여 가불을 요청하는 식의 을질을 시전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기술자들을 달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불에 응했지만[14] 끌려다니기만 하던 한순덕이 1974년에 더 이상 가불을 해 줄 수 없다고 선언하자 성심당에서 일하던 빵 공장장을 포함한 직원 5명이 단체로 탈주하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한순덕이 간단한 빵 몇 종류는 만들 줄 알았기에 가까스로 점포를 꾸려나갈 수 있었다. 현 성심당 대표인 임영진은 이따금씩 아버지의 일을 거들어주기만 했을 뿐 제과점 운영을 가업으로 여기지 않았던 평범한 대학생이었지만, 하루아침에 제빵사들이 사라지자 장남으로서 점포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직접 제빵 기술을 익히고 빵을 만들며 점포 운영을 돕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빵이 가진 매력에 빠져들어 밤을 새워서 연구하는 등 열심히 공부한 끝에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숙련된 제빵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임영진은 대학교를 졸업한 후 제빵사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공군 장교로 군복무[15]를 마치고 1981년 7월 31일에 전역한 뒤 본격적으로 성심당을 이어받아 운영하게 되었다.[16] 1982년에는 한남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던 김미진 현 이사와 만나 결혼에 골인하였고 임영진은 제빵과 전반적인 경영을, 김미진은 디자인과 마케팅 업무를 도맡게 되었다. 이 무렵 빵 공장장이었던 오용식과 함께 개발한 튀김소보로, 생크림 케이크, 포장빙수 등의 상품이 대박을 터뜨리기도 했으며 1970년대 중반 홍명상가와 대전중앙데파트 등장으로 비롯된 은행동-대흥동 일대 상권의 비약적인 성장, 그리고 성심당 바로 옆에 주택은행(현 KB국민은행 대전은행동종합금융센터)이 들어서며 유동인구의 증가 등에 힘입어 사업은 번창해갔다. 성심당이 다소 이름이 알려진 정도의 빵집에서 대전의 손꼽히는 유명한 제과점으로 거듭나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 시기이다.

초대 창업주 시절부터 "당일 생산한 빵은 당일 모두 소진한다"라는 원칙이 있었고, 따라서 팔다가 남은 빵이 있으면 전쟁 고아나 노숙인들은 물론 동네 어르신과 아이들에게까지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빵을 기부하는 등 윤리적인 경영을 하는 데에도 가톨릭 이념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빵 기부는 지금까지도 성심당의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고, 지역민들에겐 윤리적 경영의 우호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면서 '절대 오래된 빵은 팔지 않는 집'이라는 신뢰도 함께 쌓게 되었다. 어떤 날은 빵이 워낙 잘 팔려서 남은 빵의 양이 기부할 수 있을 만큼 많지 않아 기부하기 위해 빵을 더 만들어야 했던 날도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곤욕을 치른 적도 있는데, 1987년 6월 항쟁 당시 시위로 인해 팔지 못한 빵을 시위대와 전의경들에게 나눠줬다가[17] 시위대 동조 세력으로 지목되어 임영진이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및 반정부 활동 혐의로 검찰에 불려갔고 성심당은 위생 단속까지 받으며 폐업 직전까지 갔다고 한다. 다행히 임영진을 평소에 좋게 보고 있었던 이들의 적극적인 탄원과 시위 진압에 동원되었던 전경들의 증언 덕에 곤욕스러운 상황을 넘길 수 있었고 때마침 6.29 선언이 나오면서 무혐의로 풀려났다고 한다.

3.2. 침체기[편집]

1980년대 성업을 발판 삼아 1980년대 중반 인근 건물을 임대하여 매장 공간을 확장했던 성심당은 1980년대 후반부터 해당 건물 소유주가 더 이상 확장된 공간에 대한 임대가 어렵다고 통보해 오자, 1992년에 본점을 현 위치로 옮기고 빵집 외에도 경양식당, 카페 등 여러 매장을 런칭하여 공격적인 사업 행보를 이어나갔다.[18][19]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둔산신도시가 건설되면서 은행동을 포함한 원도심은 점차 위축되기 시작했으며 은행동 상권의 영향 아래 있던 성심당도 점차 매출에 둔화세가 찾아왔다. 아울러 이 무렵 파리바게뜨 등 대기업 중심의 제과점 프랜차이즈 사업이 급성장하여 개인이 운영하는 제과점들은 골목 상권까지 파고드는 대기업 제과점의 공세를 직면해야 했다. 소비자들 사이에도 유럽풍 베이커리 스타일이 선호되면서 기존에 일본 제과 스타일을 많이 따랐던 성심당도 이에 맞서 생존을 모색하였는데, 유럽식 건강빵을 출시하고 하술된 여담 문단의 이미지에서 볼 수 있는 'Sacré Cœur' 간판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럽풍 베이커리 스타일을 벤치마킹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편 임영진의 동생인 임기석이 개인사업자 성심당과 별개로 성심당 소유의 건물을 저당잡아 주식회사 성심당을 출범시키며 프랜차이즈 사업에 도전장을 냈다. 임영진이 프랜차이즈 사업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반면, 임기석은 1995년부터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하다가 크게 실패를 맛보았고, 결국 주식회사 성심당을 2003년 3월에 부도 처리하였다.[20] 프랜차이즈 법인 명칭이 은행동 빵집과 같은 성심당이었던 탓에 임영진이 운영하던 개인사업자 성심당 역시 애꿎은 피해를 입는 등의 타격이 있었다. 사업 실패 이후 임기석은 재기를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갔고 임영진 대표와도 화해했지만 2006년에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성심당은 종래까지 개인사업자 형태로 영업을 이어왔으나, 프랜차이즈 사업을 두고 벌어진 내부 갈등 끝에 투명한 경영의 필요성을 느낀 임영진은 2001년 법인 '로쏘 주식회사'를 출범시켰다.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며 빚을 진 동생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임영진 대표는 거액의 대출을 받아 동생의 건물(은행동 153번지)을 다시 매입했는데,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5년 1월 22일 밤 화재가 발생하여 은행동 145번지 본점 1~3층이 불타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21] 이때 사람들은 대부분 성심당은 이제 망했다고 생각했으나 성심당은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났다. 임영진 대표의 아내이자 공동 경영자인 김미진 이사는 이때 가게를 접으려 했으나, 직원들이 직접 비교적 쓸 만한 기계들을 수리하고 청소하는 것을 보고 복구하기로 했다고 한다. # 특히 직원들은 자발적으로 가게 안에 현수막을 걸고 페인트칠, 중고 오븐 구매 등 복구를 위해 힘을 쏟았다. 그렇게 단 5일 만에 사고를 수습하고, 6일 만에 빵을 굽고, 1주일 만에 빵을 다시 완성시켰을 때, 임직원 모두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대전 사람들에게 2000년대 초중반의 성심당은 망하기 직전의 빵집이었고 그냥 역사만 깊은 동네 빵집 수준의 위상에 선호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든 빵집이었으나, 프랜차이즈를 말아먹고 절치부심한 성심당은 꾸준하게 한 길만 팠다. 다행히 이전부터 운영해오던 위탁 급식 자체는 여전히 건재했기에, 정기 수요를 통해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 당시의 아픈 사업 실패 경험 때문에, 성심당은 지금도 출점에 상당히 인색하다. 롯데백화점 대전점 이후 2012년에 3번째 직영점이자 대전 방문객들을 노린 대전역점을 오픈했으며, 그 후에는 은행동 본점 주위의 건물을 사서 팥빙수 등 디저트 부문을 만들 뿐이다. 대전역 찐빵집으로 시작한 역사를 생각할 때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셈이다.[22]

3.3. 부흥과 대전의 아이콘화[편집]

2000년대 후반, 대전의 지역 브랜드 및 관광 명소 연구에 골몰한 지자체[23]의 성원에 힘입어, 성심당은 부추빵, 튀김소보로에만 안주하지 않고 튀김소보로 고구마 맛을 출시하고 보문산메아리, 명란바게트 등의 이색 빵 판매 전략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2010년대에 들어서 가속화된 미디어의 발달[24], 신세대 중심의 '밥 대신 빵'이라는 식생활 변화 등 요인 덕에 성심당은 프랜차이즈 사업 이전의 명성을 뛰어넘는 부흥에 성공했다.

2013년 1월엔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에 초청을 받아 1주일 간 튀김소보로 등을 파는 팝업스토어를 열었다. 특허까지 받은 튀김소보로가 나름대로 식감과 품질을 유지하면서 대량 생산이 가능해진 것이 확장력의 근원이다.[25]

롯데백화점에 입점하게 된 계기는 당시 재벌가 자녀들이 계열 호텔과 백화점 등을 통해 고급 빵집 사업을 시작하고 사업을 확장하면서 "골목 상권을 위협한다"라는 여론의 호된 질타를 받자, 이를 무마한다는 차원에서 백화점과 역의 빵 가게 자리를 성심당에 제공한 것이다. 롯데백화점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성심당은 이전의 프랜차이즈 사업의 트라우마가 있어 제안을 거절했으나 롯데백화점의 구애 끝에 이후 그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결과 서구, 유성구에 거주하는 이들이 가까운 이곳으로 몰려 대박이 터지자 서울 롯데월드몰 입점을 제안받았으나, "성심당은 대전에서만 만날 수 있다."라는 원칙을 고수하기로 해 지금까지도 성심당은 이 말을 지키며 대전에만 있다.

은행동이 소속된 구 도심권은 대전광역시청 이전과 충청남도청의 내포신도시 이전, 홍명상가의 철거 등 주요 시설이 빠져나가면서 이들에 의지하던 상권들은 점차 쇠락해가는 반면 유일하게 성심당만 구 도심권을 지탱해 주고 있다. 대전 중구도 원도심 부흥을 위해 이런저런 기획을 했지만 실패했으며, 살아남은 건 성심당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은행동 본점 주변의 건물을 구매 및 확장한 결과 케이크 전문 케익부띠끄, 한국식 디저트를 다루는 옛맛솜씨를 오픈하며 확장하였으며 이외에도 주차 공간 부지까지 구매할 정도로 무섭게 확장되고 있다. 은행동 본점이 있는 일대를 보면 거의 성심당이 차지했다고 보면 된다. 성심당의 자리보전이 중구 구도심권으로 인파가 몰리는 연계효과가 생겼고 이 상황을 활용해, 성심당 빵을 가게 내에 취식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고 성심당 영수증을 가져오면 할인까지 해주는 등, 성심당 고객들을 유치하는 전략을 내세운 인근 상가도 생겨 중앙로 으능정이 거리라는 번화가를 세우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

2014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이 KTX로 이동하며 아침식사로 이곳의 빵을 먹었다. [26] 이때 프란치스코 교황이 팁으로 유로를 주었다고 하는데, 2019년에도 그 유로화가 가게 안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창립 60주년을 맞이하며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의 친필 사인이 적힌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 기사단 훈장을 수여했다.[27] 물론 교황의 식사를 책임진 것에 대한 보답은 아니고 60년이 넘게 불우한 이웃에게 빵을 기부해 온 가톨릭 정신을 인정한 것이다. 참고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먹은 빵은 치아바타와 치즈스콘이었는데, 이때 이후로 아예 교황님의 치아바타, 교황님의 치즈스콘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고 2026년 현재도 아주 잘 팔리고 있다.

3.4. 현재[편집]

성심당은 지속적으로 성장을 거듭하여, 2015년 한 해 매출액은 400억 원에 달했다. 2017년 DCC점을 오픈, 2021년에 63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면서 전국 비프랜차이즈 빵집 중 전체 매출 1위를 차지했다. 2022년에도 800억의 매출을 기록하며 대전광역시에서 매출의 탑을 수상했으며 2023년도엔 1,243억 원으로 매출 1,000억 원을 돌파했다. 2025년에는 매출 약 2,629억 원을 기록하며 놀라운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2025년 개장한 대전 한화생명 볼파크의 상업시설로 대전에서 유명 제과점 입점 추진을 언급하는 등, 신구장 내에 팝업 스토어가 오픈되길 바라는 한화 팬과 야구 팬들이 많다. 최종적으로 입점 업체의 명단에 오르지 않아 신구장 내 입점은 불발되었다. 성심당은 점포당 약 100명 정도의 직원이 근무하는데 판매 매장과 제빵공장이 동시에 들어올 공간이 야구장에 존재하지 않기에 입점을 포기한 것으로 보여진다. 대전역점 또한 역사 내, 외부 건물에 제빵공장을 두며 교대제로 근무하고 있기에 협소한 공간의 야구장은 입점 여건이 더 좋지 않다.

2022년 성심당 DCC점이 점점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고 확장공사를 진행하면서 잠시 임시점포로 이동했다. DCC 오른쪽의 작은 가게에서 튀김소보로 등을 판매했으며, 2023년 11월에 공사를 마치고 재오픈하였다. 재오픈 이후에는 DCC 1층이 성심당 대기열로 꽉 찰 정도로 전보다도 높아진 인기를 자랑한다.

일반적으로 오전 11시부터 사람이 늘어나고 오후가 되면 웨이팅 줄이 길게 생긴다. 이러한 이유로 대전 0시축제 때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을 대비해 일시적으로 테이블링을 도입하기도 했다. 2024년 성탄절에는 본점에서 딸기시루를 구매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 새벽 5시부터 중앙로역 지하상가까지 대기열이 생기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구매대행 알바와 정가가 40,000원인 케이크를 14만 원에 파는 리셀러가 속출했다. 성심당 측에선 구매대행 알바와 중고거래 등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으나, 이러한 악성 소비자들이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성심당 오픈런에… 43,000원 딸기시루 140,000원에 올라왔다

2026년 1월 1일 레오 14세 교황이 창립 70주년을 맞이하는 성심당에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이 메시지는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이 직접 가져와 성심당에 전달했다. 임영진 대표와 김미진 이사를 비롯해 성심당 식구들은 감동과 기쁨에 말을 잇지 못했다. 유 추기경은 “레오 14세 교황님께 EoC를 실천하며 70주년을 맞은 성심당 이야기를 전해드렸더니 무척 놀라워하셨다”면서 교황의 메시지가 나온 배경을 설명했다. # 아래는 교황 레오 14세의 메시지 전문.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창립 70주년을 기념하는 대전의 유서깊은 제과점 성심당에 축복의 인사를 전합니다. 성심당이 지난 세월 동안 ‘모두를 위한 경제’ 모델에 입각하여 형제애와 연대적 도움을 증진하고자 시민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이루어 낸 중대한 사회적, 경제적 업적에 깊은 치하를 보냅니다. 여러분들이 이 훌륭한 활동을 계속 이어 나가시기를 격려합니다. 동정 마리아의 모성적 보호와 한국 순교성인들의 보호에 여러분을 의탁하며, 성령의 풍성한 은총의 보증인 사도적 축복을 보냅니다.

바티칸에서 2025년 12월 16일

교황 레오 14세

4. 위상[편집]

비(非)프랜차이즈인 전국 제과점 가운데 매출 1위를 기록[28]하고 있는 백년가게로 유명한 빵집이다. 대전에서 가장 유명한 곳 중 하나이자 전국 빵집 중 가장 인지도가 높다. 이처럼 전국구 유명 빵집 중 가장 높은 인지도를 달리는 것은 물론, 미쉐린 가이드에도 소개된 적이 있는[29] 빵집이며 대기업 중심 프랜차이즈 제과점 업계와의 경쟁에 지고 1997년 외환 위기라는 대폭탄을 맞아 한 번 도산할 뻔했다가 극적으로 부활하여 현재 은행동 일대에 6개 식당을 보유할 정도로 지역 자영업의 대표이자 모범사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타 로컬 빵집들에 비해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데는 대전광역시 당국의 협조, 서울역에서 KTX로 수서역에서 SRT로 1시간 거리인 대전역에서 다시 도보 15~20분 거리인 적절한 위치,[30] 꾸준한 메뉴 개발과 직원들에 대한 과감한 투자 등을 꼽을 수 있다. 실제로 위에서 언급한 이른바 3대 빵집들 중에서 고속철도 정차 관리역까지 도보 20분 이내로 접근할 수 있는 곳은 성심당 한 곳뿐이다. 충청권의 또 다른 유명 빵집인 뚜쥬루의 경우 도심인 성정동의 본점은 약소한 규모이고 본진을 사실상 구룡동의 빵가마마을로 옮겨 대중교통보다는 자가용 위주의 유원지 전략으로 가져가 대조를 보이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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